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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는 과연 실재할까?

by simsim_s 2021. 6. 4.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좋고 싫고 무덤덤한 여러 가지를 느끼며, 느낀 바에 따라서 생각하고 의도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은 여러 가지 결과를 일으키지요. 그렇게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경험되고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나’라는 것은 과연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를 5가지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전통용어로는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오’는 숫자 5를 말하고, ‘온(蘊)’은 ‘모임, 집합, 뭉치’를 의미합니다. 다섯 가지 집합, 다섯 가지 모임 정도의 의미가 되겠네요.

 

이 다섯 가지가 무엇일까요?

 

(1) 신체 (색 色) : 소위 말하는 나의 육체입니다.

 

(2) 감수작용 (수 受) : 어떤 경험을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좋음, 싫음, 무덤덤함. 이 3가지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험을 하든 그 경험은 좋거나, 싫거나, 아무렇지도 않고 무덤덤한 경험 중의 하나를 일으킵니다.

 

(3) 표상작용 (상 想) : 경험한 그 대상의 모습이 내 의식 안에 상으로 맺히는 작용입니다. 마치 카메라를 비추면 화면에 사물이 나타나고 초점이 맞는 것과 같은 작용입니다.

 

(4) 심리의지작용 (행 行) : 우리의 마음이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할 때, 그와 함께 여러 가지 심리작용과 의지들이 발생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시키는 힘, 대상을 분석하는 힘, 대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힘, 대상에 대한 집착, 분노 등등. 이러한 심리와 의지작용 모두가 4번째 요소입니다.

 

(5) 의식 (식 識) : 외부 대상을 경험하고 분석하고 그에 대해서 의지를 일으키는 주체인 우리의 의식 그 자체입니다. 전통적으로 의식은 왕과 같고, 2-4번째 요소는 신하와 같다고 합니다. 왕이 신하들의 주인이지만 그 자체로 무엇을 하지는 않지요. 실제 일은 신하들이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권한은 모두 왕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2-4번째 요소는 우리의 의식이 있기 때문에 기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다섯가지를 경험하고, 이 다섯 가지 전체 혹은 다섯 가지 중의 어떤 것이 바로 ‘나’라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사실은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잡아함경』 권10 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觀色如聚沫 관색여취말

물질(색)을 거품 뭉친 것과 같이 보라.

 

受如水上泡 수여수상포

감수작용(수)는 물 위의 거품처럼 보라.

 

想如春時燄 상여춘시염

표상작용(상)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보라.

 

諸行如芭蕉 제행여파초

모든 의지심리작용(행)은 파초나무처럼 보라.

 

諸識法如幻 제식법여환

모든 의식(식)을 환영처럼 보라.

 

日種姓尊說 일종성존설

태양의 종족의 존귀하신 분(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이다.

 

이 말씀을 해석해볼까요?

 

비누 거품이 이리저리 뭉치면 강아지 모양이 되기도 하고 고양이 모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거품에 지나지 않지요. 물을 확 뿌리면 거품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거기에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본래 없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여러 세포와 분자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나의 몸’이라고 결정하고 집착을 하고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나의 몸’이란 비누거품으로 만든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 위의 거품은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터져서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 물위에 거품이 뜬 그 순간에 거품 표면에 빛이 비추면서 무엇인가가 반짝이고 오색찬란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만지려고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터져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수작용, 좋고 싫고 무덤덤한 그 감각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순간 새롭게 생겨났다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 생각하지만 이어진다면 그것은 멈춰질 수가 없겠지요. 유사한 감각이 새롭게 순간마다 생겨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각이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하지요. 그리고 그 좋고, 싫고, 무덤덤한 그 안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구합니다. 그 찰나를 위해서 삶 전체를 바치기도 하고 파멸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위에 뜬 거품에 비친 오색찬란한 빛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봄철에 날이 더우면 지표면에 수증기가 증발하는데 거기에 햇빛이 굴절되면서 뭔가가 아른아른 거립니다. 이것을 아지랑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사막에서도 간혹 멀리있는 오아시스의 모습이 나타나서 신기루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외부 사물의 모습을 내 안에 이미지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실제의 사물인가요? 그것은 실제의 사물이 아니고 내 안에 맺혀진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늘 그렇듯이 나의 심리상태와 선입견 등에 의해서 온갖 형태로 변형되고 왜곡되지요. 마치 신기루처럼 아지랑이처럼, 실재하지 않지만 목 마른 사람들은 그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파초는 불교에서 주로 겉으로 볼 때는 있어 보이지만 막상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파초가 여러겹의 껍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겹씩 벗기고 나면 속에 아무 것도 없이 없어져 버리거든요. 심이 없는 양파라고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네요.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마치 호기심많고 산만한 원숭이 한 마리가 있는 것처럼, 온갖 의지와 심리 작용들이 이러저리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작용들을 깊이 관찰하지 않으면 마치 어떠한 하나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파초의 껍질을 하나씩 까고 또 까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듯이, 이 온갖 심리의지작용들도 하나씩 분석해보면 결국에는 발견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화를 내고 욕심을 내지만 실제로 분석해보면 도대체 무엇에 누가 어떻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발견할 수가 없지요. 무엇인가에 집중한다고 했을 때, 집중이라는 것은 대상에 의식을 고정시키는 작용이지요. 그런데 모든 사물은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 의식은 도대체 어디에 고정되고 있는 것일까요? 대상에 계속해서 변하는데 고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집중이란 무엇일까요? 이렇게 분석해보면 아무 것도 발견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환영이라는 것은 컴퓨터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온갖 이미지들이 실제로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여러 화면 입자들이 모임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의식’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결국에는 앞의 모든 경험에 대한 집착과 정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이라는 대상이 있어야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신체적 경험, 감수작용, 표상작용, 심리의지작용이 모두 발견할 수 없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의식은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환영과 같다면 그것을 경험하는 의식조차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통용어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자아를 구성한다고 집착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사실은 모두 어떠한 견고하고 고정된 실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다 허상이고 환영이라면 모든게 허상이고 환영이라는 것 아니야? 그건 완전 허무주의 아니야?

 

그렇지 않습니다. 더러운 포장지에 쌓여있던 금덩이가 세상에 나타나듯이,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고 있던 다섯 가지 허망한 요소들이 이러한 분석을 통해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진정한 ‘나’입니다. 이 진정한 ‘나’는 죽음과 태어남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주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성품, 부처님으로서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불교 수행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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